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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회사원] 라면 60개도 후루룩 … 맛의 지도 넓히는 味개척자들
진영화 기자 cinema@mk.co.kr
입력 : 2023-02-12 15:47:24 수정 : 2023-02-12 19:17:56
오감 모두 동원해 맛 평가
식품기업 대장금 '관능팀'
식품기업 대장금 '관능팀'

◆ 가장 먼저 맛보는 사람들
소비자가 맛볼 수 있는 하나의 완제품이 탄생하기까지 크게 '트렌드 조사→제품 개발→연구소 시제품 생산→안정성 평가→관능 평가→소비자 만족도 및 내부 최종 평가→생산→제품 출시' 단계를 거친다. 단계별로 순탄하게 진행되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고, 어느 단계에서 반려되든지 처음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공들여 개발을 마쳤더라도 출시 가능성이 없으면 '드롭'되는 일도 적지 않다. 이렇게 험난한 신제품 출시 과정에서 관능 담당자들은 소비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 앞서 맛을 보는 이들이다. 단순한 시식이 아니다. 전문적인 맛보기다. 훈련된 감각을 동원해 맛을 세분화해서 각각의 특징을 잡아낸다. 회사에 따라 시료를 기계에 떨어뜨리면 단맛·짠맛 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맛의 지도'를 그려주는 전문 장비, 일명 '전자 혀'를 둔 곳도 있지만 관능팀의 평가와 다르게 나오는 일은 드물다. 관능팀이 더 섬세하게 특징을 잡아내는 게 일반적이다.
"단맛(브릭스·brix)이나 매운맛(스코빌 척도·SHU) 같은 맛의 수치가 있지만 숫자가 같아도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의 패턴은 천차만별입니다. 매운맛을 예로 들면 코가 찡하게 매운 겨자의 매운맛, 혀에서 통각을 자극하는 얼얼한 청양고추의 매운맛, 뒤에서 목을 누르는 매운맛 등 어떤 원료인지에 따라 입안에서 느껴지는 '마우스필(mouth feel)'은 다릅니다."(서영주 농심 스프개발팀 선임연구원)
취식 방법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 "종이컵으로 마실 때와 사이즈별 숟가락으로 마실 때마다 먹는 느낌이 달라져요. 커피를 관능 평가할 때는 국자 모양의 '커핑 스푼'을 앞니에 대고 한번에 빨아들여 혀 위에 분무해 혀 안에 고르게 퍼뜨립니다. 그리고 입안의 느낌, 단맛, 보디감, 뒷맛의 깔끔함 등을 평가하죠."(김채영 매일유업 음료연구그룹 커피연구팀 연구원)

◆ "이건 단맛 4, 신맛 2, 짠맛 7"
관능 담당자들이 처음부터 맛 구분을 잘했던 건 아니다. "먹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고 말할 정도로 많이 먹고 그 맛을 표현하는 언어를 가다듬는 훈련의 결과다. "관능 평가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고 관능 담당자들은 입을 모은다. 사람마다 고유의 경험에 따라 맛 평가가 달라질 수 있고 평가가 기호에 좌우될 수 있지만, 맛에 대한 감상을 소통 가능한 언어로 치환하고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공통의 언어를 학습한다. 식품회사의 '장금이'들이 단순히 맛있다, 짜다는 표현을 넘어 객관적인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 평가 언어, 평가 방법 등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이유다.
맛은 어떻게 객관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SPC그룹에서 관능 연구와 교육, 관능 평가 시스템 관리, 소비자 조사 등을 담당하는 센서리 랩(Sensory lab)의 경우 팀원들이 인지하는 맛의 강도를 통일시킨다. 예컨대, 특정 용액의 단맛 강도가 10점 만점에 5점이라고 정의하면 팀원 모두가 그 맛을 5점으로 평가할 때까지 반복해서 맛을 본다. 이후 10점짜리 단맛을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정의해 모두가 그 사이의 맛을 평가할 수 있도록 기준점을 세우는 것이다. 변영선 SPC그룹 센서리 랩 수석연구원은 "소금, 설탕, 구연산, 카페인 등을 농도별로 녹여 단맛·짠맛·신맛·쓴맛 네 가지 맛의 강도를 다르게 한 수용액을 만들어 모두가 비슷한 점수를 줄 수 있도록 훈련을 거듭합니다. 모두가 '이건 단맛 4, 신맛 2, 짠맛 7이네요'처럼 말할 수 있게요"라고 말했다.
'삼점 검사(triangle test)'라는 방법론을 활용한 간단한 훈련도 있다. 코카콜라 2개, 펩시 1개처럼 같은 제품 2개와 다른 제품 1개를 한꺼번에 제시하고 다른 제품을 골라낼 수 있는지 검사해, 서로 다른 두 맛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판정하는 것이다. 맛을 평가할 때는 아무런 사전 정보를 주지 않고 맛 인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용기, 조명 등을 모두 통일하는 '블라인드 테스트'가 기본이다. 감각이 쉽게 피로해지는 탓에 검사는 30분 이내로 끝낸다.

농심 라면은 '면개발실'에서 탄생한다. 면개발실 밑에 스프개발팀, 면개발팀, 별첨개발팀, 해외제품개발팀 등이 있고 각 팀은 신라면 등 브랜드를 나눠 갖고 제품 개선과 원료 대체 이슈 등을 담당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신제품 개발이다. 하나의 의도된 맛을 내기 위해 팀별로 맛을 설계하고, 관능 평가를 진행한다.
스프개발팀의 경우 된장맛, 우골맛 등 각 맛 특성별로 5점과 10점짜리를 반복해서 맛보며 기준점을 정한다. 강도별로 훈련을 주 1~2회 거친다. 이런 훈련을 거쳐도 처음 맛 표현을 하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신입이 입사한 이후 2~3년은 족히 걸린다. 서영주 연구원은 "처음엔 회사 선배들이 먹어보고 표현하라고 해도 못했어요. 익은 양파 풍미인지, 생양파 풍미인지, 소태를 오래 푹 익혀 갈변해 볶은 풍미인지, 물에 찐 풍미인지 등등. 선배들의 평가를 어깨 너머로 배우고, 스스로도 계속 원료와 제품을 먹어보며 훈련한 결과 이제야 조금 알겠습니다."
유업체인 매일유업은 주로 우유 지방을 구분하는 관능 훈련을 실시한다. 무지방과 1%, 2%, 3.6%의 유지방 용액을 함유량에 따라 순서를 나열하는 식이다. 더 예민한 사람을 대상으로는 3%와 3.1%를 구분하게 하는 등 분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테스트한다. 커피연구팀의 경우 커피 맛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고 산지별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월 1회 '커핑'으로 불리는 관능 실험을 한다. 큐그레이더(커피감별) 자격을 취득한 김채영 연구원은 "커피콩이 건조한 상태에서 나는 향은 프래그런스(fragrance), 커피콩에 물을 부었을 때 나는 향은 아로마(aroma),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전체적인 풍미를 플레이버(flavor), 마신 후에 느껴지는 후미(after taste)까지 비교하면서 맛을 본다"고 말했다.
신제품 개발을 할 때는 업계 용어로 '대외 시식'이라고 불리는 맛집 탐방도 필수다. "손님이 몰리는 인기 식당이면 예약하려고 팀원 전부 다 밤 11시 59분에 알람 맞춰놓고 '광클(빛의 속도로 클릭)'해서 겨우 테이블 하나 예약해 시식하러 가곤 합니다. 양념장이 독특한 잔치국숫집이 경남 김해에 있다고 해서 KTX와 택시를 타고 하염없이 국도를 걸었던 적도 있어요. 국수 한 접시에 3500원이었는데 교통비만 30만원 들었죠."(서영주 연구원)

◆ 우리 입맛에 맞아도, 소비자는 다를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신제품이 내부 기준을 충족시키면 소비자 만족도 평가에 앞서 사내 관능 전문 패널팀에 넘긴다. 이들은 회사에서 마케팅, 구매, 생산, 영업 등 본업은 따로 있지만 맛에 일가견이 있는 회사 내 숨은 '황금 혀'들이다. SPC그룹의 경우 모집 공지를 띄워 테스트를 거쳐 15~20명 규모로 선발한다. 이들은 평가가 실제 유효한 것으로 판정될 때까지 6개월짜리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소비자 평가 전문업체에 의뢰해 평가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평가 방법을 정립하는 건 관능팀의 일이다. 무언가를 먹을 때 어떤 맛인지 주관식으로 평가를 요청하면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가 어떻게 맛을 인지하고 표현하는지 사전에 연구해 설문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한 회사는 자사 우동 제품 맛에 대한 소비자 평가에 앞서 '우동면 맛 인지 연구'를 진행했다. 우동면을 먹을 때 소비자가 어떤 표현을 쓰는지, 우동면의 어떤 속성을 중시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180명을 상대로 18종의 경쟁사 제품을 시식하게 했다. 제품별 만족도 평가와 서술 응답으로 받은 결과지는 텍스트 마이닝 기법을 적용해 키워드를 도출해냈다. 변영선 수석연구원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우동면은 식감은 쫄깃하고 탱탱하며 퍼지지 않고 부드러운 면이었다. 통통하고 윤기가 흐르는 흰색의 외관에 밀가루 맛이 나지 않고 국물이 잘 밴 면. 이 조사를 기반으로 설문 문항을 구성해 우리 제품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 평가를 기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 평가가 의도한 대로 나오지 않으면 맛을 바꿔 재도전에 나선다. "세상에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든 형태로 준비해놨다"는 농심의 스프개발실은 마치 한약방을 방불케 하는 공간인데, 여기서 처방을 바꾼다.
완제품을 출시했다고 끝이 아니다. 끊임없는 개선이 필요하다. 소비자 입맛의 변화나 요구사항에 따라 바꾸기도 하고 해마다 작황에 따라 달라지는 원재료의 맛에 대응하기 위해 또다시 관능 평가에 나서기도 한다.

◆ "없는 답 찾는데 질리지 않아요"
관능 업무 담당자로서 고충도 있다.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데, 맛이 있든 없든 계속 먹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소비자 조사를 10차례 하려면 연구원들은 그 조사에서 다룰 제품을 택하기 위해 10배에 가까운 제품을 먹어야 해요." "신제품을 개발할 때는 라면을 하루에 50~60봉지씩 먹습니다. 점심, 저녁을 굶어도 배가 안 고파요. 한동안 저희가 개발한 제품은 쳐다도 못 봅니다." "산의 일종인 구연산을 다른 용액과 섞어 강도별로 구분하는 훈련을 할 때 쓴맛과 신맛을 반복해서 먹으면 속이 좋지 않습니다. 맛에 대한 예민함을 끌어올려야 할 때는 밤낮 흰죽만 먹기도 합니다." 위장에 문제가 생기는 때도 있어서 건강검진을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자주 받기도 한다.
웃지 못할 직업병도 있다. 가족이나 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제발 부탁인데 그냥 먹어라"는 면박을 듣는다. 음식을 맛보며 분석하고 평가하는 게 일이다 보니 생긴 버릇이다.
관능이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서영주 연구원은 "답이 없는데 답을 찾아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고 꾸준히 사랑받는 제품을 내놓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질리지 않는다"고 관능 담당자들은 말했다. "맛 개선을 위해 치열하게 작업한 끝에 내놓은 제품이 실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았을 때의 쾌감이 대단하고 맛의 세계를 끊임없이 공부해야만 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진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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